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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9.18. 후배의 소개팅 망치기

포카리안

by pokerian 2022. 7. 1.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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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9.18. 5년이면 동네가 변한다.

내가 오래간만에 집에 갔다.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이제 머리를 감으려고 했는데 보일러가 고장이 났는지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았다.
찬 물에 머리를 감을 것인가. 에잇 대중 목욕탕이나 가자.

"동생아, 목욕탕 어디가 좋냐?"
- "땡땡 대중 사우나에 가."

그래, 5년 만에 땡땡 사우나를 가 보겠구나. 집을 나서서 줄래줄래 목욕탕을 향해 걸었다.
건널목을 두 번 건너야 되었지? 에잇, 신호등이 빨간 불인데 그냥 다음 육교를 이용하자.
그런데, 가다보니까 이상하다. 어라? 육교가 있을 자리를 내가 지났는 걸? 윽, 그 사이에 육교가 없어진 것이다. 투덜투덜.

다른 길로 목욕탕에 갔다.

카운터에 한 아줌마가 계셨다.
"대인 하나요." 입욕권을 받았다.

'여기는 1층이 여탕이고, 2층이 남탕이었어."

2층으로 올라갔다. 목욕탕 입구는 보통 문이 두 개인데 친절하게 바깥문 하나는 열려 있었다.
이제 내 눈 앞에 있는 비닐이 붙여진 유리문만 열면 탈의실이다.
자고 일어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이 아직 가물가물하다. 빨랑 씻고 정신을 차려야지.
신발을 벗고, 이제 신발장에 내 신발을 올려 놓으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신발장에는 예쁜 운동화들과 하이힐들이 진열되어 있다.
뭐냐, 이거, 유니섹스시대인가, 참나, 요새는 남자들이 별 걸 다 신고 다니는군.

어? 샌들도 끈들이 다 요상망측하네. 아무리 둔한 나였지만, 그 쯤 되니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한번 확인해봐야겠다.

내가 있던 곳에서 쓰윽 몸을 뒤로 빼서 간판을 쳐다 보니 써 있는 글자는, 여탕입구! 으악.

아이고, 남탕이 2층이 아니라 3층이었나보다. 5년 지났다고 내가 기억을 잘못했구나.
그런데 3층으로 올라갔더니 3층에는 입구가 없다. 이상하다.
4층인가? 4층에 갔더니 4층은 옥상이었다.

다시 3층, 2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2층 입구 계단에서는 이제 막 여탕에서 나오는 한 여자분과 눈이 마주쳤다.
애써 그 분의 눈을 피하려고 했지만 나를 흉악범 쳐다보듯하는 그 시선을 난 느낄 수 있었다.

1층 카운터로 뛰었다.
"저기요, 남탕이 어디에요?"

카운터의 아줌마는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다. "지하에요."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하고 가려고 하는데, 그 아줌마 뭔가 이상했는지 소리를 치신다.
"지하예요! 지하! 지하요, 지하!", 꼭 "도둑이야!" 소리치시는 딱 그 목소리였다.

여러 여자분들에게 이상한 눈초리를 다 받고 이제 지하의 남탕에 들어갔다.
어머나, 여기는 입구의 문이 두 개가 다 열려 있네. 그냥 입구에 들어서면 탈의실까지 보이던 것이었다.

아, 아까 내가 갔던 2층 목욕탕 문도 두 개가 다 열려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흐흐.
아까 내가 다시 몸을 빼내서 목욕탕 간판을 확인하지 않았으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파하.
십몇 년 만에 내가 여탕입구에 다시 가 보았구나. 크흣.

이러저러한 생각과 함께 목욕을 하고는 집에 잠시 들른 다음에 약속장소인 응응역으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래, 땡땡번 버스를 타면 응응역으로 바로 갔지. 땡땡번, 땡땡번, 땡땡번... 땡땡번 버스가 왜 안 오지? 그동안 땡땡번 버스가 우리 동네에서 없어져 버렸다!

세상에, 그 동안 누가 이렇게 우리 동네를 다 바꿔 버린 것이야!
그래서 땡땡번 버스를 타려는 삽질을 하고 약속장소에 늦게 되면서 다음 글에서 계속 이야기할 비극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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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9.18. 후배의 소개팅 망치기.

응응역에서 어제 2시에 우리 후배 T군에게 소개팅을 시켜주기로 했었다.
T군도 나처럼 좀 삽질을 즐겨하는 녀석이라 약간 불안하기는 했다.

T군의 소개팅 상대는, 자신이 토끼띠라고 꿋꿋이 우기는 모모년 1월 생인 여자이다.
T군의 생일은 같은 해 모모년 3월에 있다.

그녀가 연하 남자랑 소개팅을 하기는 싫다고 했기에, 그 여자애한테는 내가 미리, 소개팅 상대가 내 동기라고 뻥을 쳤었다.
근데 T군한테는 미처 미리 말을 못 해놓아서, 소개팅 조금 전에 내가 응응역에 도착한 후에, "넌 내 동기니까 나랑 편하게 말해야 돼."라고 말해주려고 했다.

근데 내가 땡땡번 버스를 타려고 삽질을 하다가 결국 택시 타고는 약속장소인 커피숍에 2시 10분에야 도착하게 되었다.

커피숍에 들어갔더니, 이게 웬일인가?
(여자 이름은 얘기하지 말자)

T군이랑 말자랑 이미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얘네, 뭐야. 왜 소개도 안 해 줬는데 벌써 같이 있는 거야!
아니, 그럼 나는 왜 왔지? 으으으!

하지만 태연하게 물었다.
포카: T야, 너 언제 왔어.
T: 2시 10분 전에요.
'윽, 너 왜 내게 존댓말을 하는 거야, 이게 아닌데...'

포카: 말자는 언제 왔어?
말자: 응, 2시 5분에 왔어요.
'으, 말자는 왜 오늘따라 시간을 잘 지켜버린 거야, 으으으...'

아, 분위기가 이상하다.

포카: (T에게) 너희 어떻게 알고 둘이 같이 있는 거야?
T: 카운터에서 '황포카님 면회왔습니다.' 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가서는 '소개팅하러 오셨어요?' 라고 했죠.
포카: 아, 그랬구나.
'아이고, 잘했다. 그냥 내가 올 때까지 서로 모르는 척하지 그랬냐.'

포카: 그럼 소개시켜줄까?
T: 이미 다 소개했어요.

사태가 짐작이 되었다. 말자는 왠지 말이 없는게, 나한테 속았다는 걸 알아챈 듯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죄없는 T군은 괜히 미움을 받고 있는 듯했다.

포카: (T에게) 무슨 얘기했어?
T: 저, 포카 형 후배인데요. 포카 형이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고.
포카: (T의 입을 막는다)
T: 윽윽.

포카:(귓속말로) 네가 내 후배라고 얘기했어?
T_T:(태연하게) 네!

말자: 둘이서 무슨 얘기 해?
포카: 네가 예쁘다는 얘기를 하고 있어. -_-;;

말자의 눈빛은 싸늘했다.

T_T: (말자에게) 말이 별로 없으시네요.
포카: 아, 쟤가 원래 좀 말이 없어. -_-;;

아, 후배 중에 독립군 한 명 해방시키려다가, 세상에나. 으흑, 넌 잘 될 수 있었는데.
아아, 땡땡번 버스만 없어지지 않았어도 이러지 않았을 텐데 흑.
내가 T에게 미리 이야기를 안 한 게 정말 잘못이었어.
T야, 너무 낙심하지마. 페스티발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있잖아? 작년에 내 동기 중에는 당일날 아침에 파트너를 구해서 페스티발에 데려간 친구도 있었어.

나는 커피숍에 30분 정도 있다가 나오는 바람에, 그 뒤의 이야기는 아직 모르지만, 아마도 T군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는데에는 술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이따가 T에게 한 잔 사주기로 했다. 

@ 살던 동네를 몇 년 만에 찾아갔더니 커다란 삽질을 하고야 말았다. 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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